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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 한시 보급형(중형) 족자 + 한국 기독교 선구자 이수정 도서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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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의 산파..이수정 한시족자 + 한국 기독교 선구자 이수정 도서 세트
족자 사이즈 : 42 * 99 cm


한국 기독교 선구자 이수정!!

그의 헌신적인 사역으로 인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초기 선교사로 입국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 뒤에는 이수정씨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임오군란 시 민비의 생명을 살린 공
로로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할 때 2차 신사유람단의 비수행원으로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한 그는 일본의
근대화된 문명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처음 본 기차며 자동차 등이 적잖은 문화적 충격을 주었지만
그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가 일본이 기독교문화를 일찍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농학박사이자 그리스도인이었던 쓰다 박사를 만나 신약성경을 받은 후 나까다 목사로부터 성경대의를 교육
받았다.이후 도쿄제일교회에서 성탄절 예배에 참석하며 복음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한 그는 1883년 4월에 일본
에 온 지 7개월만에 일본어로 세례문답에 합격하고 현재의 시바교회에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수정은 복음에 대한 진리를 깨달아 갈수록 조선에도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사명을 갖고 기도하던 중 일본
인 목사와 미국 선교사의 협조로 선교사 유치운동을 전개하는데 그가 쓴 편지가 미국 선교잡지에 실리면서
처음으로 조선이 소개되었다.이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에 선교사가 파송되었다.이수정은 일본 체류 중 미국
성서공회 루미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마가복음서를 번역하는 대업을 이루고,아울러 조선 선교를 파송받아 일본
을 방문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며 선교의 중간 교두보 역할을 효과적으로 감당하였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역사요,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였음을 깨닫게 한다.
한국 교회에 이런 이수정씨를 뒤늦게나마 소개하는 일과 그의 업적을 기려 다시금 선교의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 이 수 정

1843
전라도 옥과에서 출생
과거 문과에 합격,홍문관 벼슬

1882
임오군란의 위기에서 민비구출
제2차 신사유람단 비수행원으로 도일

1883
조선인으로 최초 세례 받음(야스가와 목사)
미국에 편지를 2차에 걸쳐 보냄으로
조선 선교사 유치운동

1884
마가복음 한글로 번역 발간
일본에서 한국 유학생들에게 성경공부
일본에서 미국 선교사들에게 조선말 가르침

1886
조정의 강제소환으로 귀국
정적에 의해 처형(순교)

이수정 족자
위의 글은 이수정이 서경공회 교인들에게 증정한 한시이고 밑에는 그 한시를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이 한시를 읽어보면 그의 신앙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이 한시는 이수정이 죽은 후 114년 만에 발견되었고, 119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이수정은 1886년 5월에 44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어떻게 이런 신앙고백을
했으며, 그리고 그가 왜 한국선교의 산파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수정은 평창 이씨로서 한국에 천주교를 전한 이승훈과 같은 집안이다. 그는 한국 정부의 한 관리였는데,
1882년 6월에 일어났던 임오군란(壬午軍亂:일본식 군제도입과 민비 정권의 횡포에 반항하여 일어난 군대반란사건)때 위기에 빠진 민비(고종의 황후)를 남장시켜 지게에 지고 궁궐을 빠져나가 충주로 피신시킨다. 그 공로의 대가로 그는 1882년 9월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 수신사로 갈 때에 그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가게 된다.
이수정이 일본으로 간 이유는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농사개량법을 시찰하고 돌아온 친우
안종수로부터 예수의 산상보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크게 감명되어 일본에 건너갈 것을 결심했다. 안종수는 동경에서 일본 농학계의 권위자 쯔다센(津田仙) 박사를 방문하였을 때, 그의 집 벽에 걸려 있는 산상보훈 족자를 읽어보고 크게 감복되어 서울에 돌아오자 국왕과 친우들에게 기독교가 참도인 것과 기독교 배척의 부당성을 역설하였고,
특별히 친우 이수정에게 일본에 건너가면 쯔다센박사를 찾아가서 기독교에 대하여 좀더 깊이 연구할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일본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쓰(H.Loomis)목사의 소개에 의하면 이수정은 궁정역사가(Hewas formerly Government Historian, The Forein Missionary 1884년 1월 p.336)라고 기록 되어 있다. 궁정역사가라면 홍문관 제학, 혹은 교리(校理)였거나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에 해당되는 벼슬이 꽤 높은 지위의 인물이었고, 그는 특히 어학에 천재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1882년 9월에 일본 동경에 건너간 이수정은 쯔다센 박사를 찾아가 기독교의 진리를 묻고 한문 신약성경과
「천도소원(天道溯源)」이란 기독교 교리서를 탐독한 뒤에 기독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 일본인 목사 야스가와(安川亨)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낙스(George William Xuox)목사의 인도로 1883년 4월 29일 동경 이스즈끼마찌(露月町)교회(현 시바교회=芝敎會)에서 야스가와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본래부터 높은 지위와 학식이 있는 이수정의 진리 탐구에 대한 열성은 곧 일본 사회에 명성을 떨쳐 인기가 있었고, 곧 동경제국대학 한국어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883년 5월 8일로 12일까지 동경싱에이(新榮)교회에서 개최된 제3회 일본전국 기독교대회에서 그는 대회
4일인 5월 11일 집회에서 오구노목사의 요청으로 한국말로 대표기도를 올렸고, 대회 마지막날인 12일에는 닙보리 아소까야마 수정원에서 열린 야유예배에서 일본말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는 설교를 했다. 그 기사는 육합잡지(六合雜誌 제34호 1883년5월)에 실려있다.

이수정의 간절한 소원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동포에게 전하는 일이였다. 일본 요꼬하마 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쓰(Henry Loomis)는 이수정에게 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할 것을 요청했고, 이수정은 성경번역에 나섰다. 이수정은 모든 시간과 정력을 성경번역에 쏟았다. 처음에는 한문성경에 토를 달아서 읽기와 이해를 쉽게 하는 것이었다.
이일은 시작한지 몇 달 만에 신약전서 전체를 마무리 지었다. 소위 ‘현토성서(懸吐聖書)’라는 이름으로 「신약성서 마가전」이 1884년 11월에 출판되었고, 그러나 현토성경은 한자를 읽을 수 있는 지식층만 읽을 수 있어 한글성경의
번역을 시작했다. 1883년 6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마가복음의 번역이 끝나고 곧이어 출판하였다. 이 번역본은 미국
성서공회가 맡아 1885년 2월 요코하마에서 1천부가 발간되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번역을 되었으나 출판은 되지 못하였다. 이어서 한글역 4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초고가 완료되었고, 로마서의 한글역이 진행되었다. 그가 번역한 성경은 1885년 한국에 처음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온 언더우드(H.G.Underwood)선교사가 한국선교를 갈 때 가져가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그곳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S. Maclay)의 요청에 의해 감리교 요리문답서도 번역하여, 1천부가 출판되어 국내에 유입되어 널리 읽혀졌다.

이수정은 성경번역과 함께 동경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유학생들과 거주하는 교포들을 상대로 열심히 전도하였다. 1882년말까지 20명의 결신자가 생겼고, 1883년 가을에는 이수정의 주재하에 한국인 주일학교가 발족되었고,
1884년 초에는 한국인 교회가 설립되었다. 유학생중에서 세례를 받고 신학교(메이지학원 신학부)에 입학한 김익승과 박명화가 있었고, 그 외에는 이경필, 이계필, 이주필 형제들과 서재필, 박응하 등이 있었다. 서재필은 나중에 기독교계와 민족을 위해 큰일을 감당하게 되었다.
1885년에는 그들을 위해 「낭자회개」라고 하는 전도문서를 출판하였다. 이수정의 권고와 전도로 유력한 인사들 중에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고,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와 있던 김옥균도 그에게 감화를 받
았고, 그는 자신의 지도하에 있는 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생활을 권장했다. 또 한찬위라는 카톨릭신자도 개종시켰고, 종두법 도입을 위하여 노력한 박영선씨도 개종케 하였고, 그의 아들은 미국 기독교 학교에 유학하였다.
이수정은 선교사 중에서도 위대한 선교사 노릇을 했다. 그는 1883년 7월과 12월에 두 차례에 걸쳐 미국교회에 선교사 파송 청원서를 보냈다. 청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 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다른 나라가 그들의 교사들을 신속히 파송하리라 생각하며, 또한 그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까하여 걱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들이 파송하는 선교사들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수정의 간곡한 청원으로 미국북장로교선교부는 한국선교를 결정하고 선교기금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1884년 초까지 7,000불의 선교기금이 모금되었다. 미국 감리교회에서도 미국에 사절로 온 민영익을 만나 실정을 알게 된 가우처(John H.Goucher)목사의 기증한 2,000불의 선교기금을 기초로 한국선교를 결정하고 1884년 6월 일본주재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Maclay)목사를 서울에 보내어 선교 개설 준비를 했다.

그의 최후는 참 불행했다. 이수정은 그 당시 우리나라 정치실정에 따른 갑신정변으로 인해 한국정부의 노여움을
샀고, 심지어는 교분이 두텁던 개화당의 김옥균과도 사이가 나빠졌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결국 이수정은
애국충정심이 오해되어서 1886년 귀국 즉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한 일설에는 국가에서 금하는 기독교를 믿고 성경을 번역하고 전도한 까닭에 이것이 죄목이 되어 죽었다고도 한다. 만일 이설이 맞는다면 그는 위대한 순교자의 반열에 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국기독교사에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고 그로 인하여 한국선교가 일어났으니 그를
한국선교의 산파라 함에 부족함이 없겠다.

*참고:이찬영, 한국기독교회사총람,소망사,1994.
김인수,한국기독교회사,한국기독교출판사,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