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존 번연
1628년 영국 베드퍼드 주의 엘스토우에서 가난한 땜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나 읽기와 쓰기를 겨우 익힐 무렵,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 밑에서 땜장이 일을 배웠다. 열여섯 살에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고, “결혼하기 전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짓을 하는 데 나를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는 자신의 고백처럼 방탕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20세에 가난하지만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가 결혼지참금으로 가져 온 두 권의 신앙서적을 읽으며 비로소 신앙을 갖게 되었다. 1655년 존 기포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평신도 설교자로서 사역을 시작하여 낮에는 땜장이로, 밤에는 능력 있는 설교자로 영혼들을 구원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허가 없이 설교했다는 죄목으로 1660년 체포되었다가 잠시 풀려났으나 더 이상 설교하지 말라는 당국의 명령을 끝내 거절하고 12년의 긴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옥에 갇혀서도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1678~1684)’과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Grace Abounding to the Chief of Sinners(1666)’를 집필하며 구원을 향한 사역을 그치지 않았으며, 석방된 후에도 1688년 폐렴으로 죽기까지 목사, 설교자, 집필자로 활동하며 수많은 이들에게 구원을 일깨우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불러 일으켰다.
지은이 ┃ 리처드 백스터
영국의 대표적인 청교도 목회자인 리처드 백스터는 1638년 영국 국교회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641년부터 키더민스터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백스터는 그 지역 전체가 변화될 정도로 놀라운 영향력을 끼쳤다. 청교도 혁명 때는 의회파에 속하여 크롬웰군의 군목으로 일했다. 왕정복고 후 찰스 2세가 궁정 사제로 선임하고 국교회 주교직을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1662년 ‘통일령’의 공포와 함께 국교회를 떠나 박해를 받으면서 비국교도 목사로서 설교를 계속했다. 1685년 국교회를 중상했다는 이유로 18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그가 저술한 책은 200권이 넘으며, 그 가운데 ‘성도의 영원한 안식’(1650)이 가장 유명하다. 키더민스터의 교인들과 비국교도들이 세운 그의 기념비를 통해 그가 신앙심 깊고 용기 있으며, 재능이 뛰어난 청교도였음을 알 수 있다.
“1641년부터 1660년까지 이곳은 리처드 백스터의 일터였다.
이제 여기는 그의 기독교적 지식과 목회적 충실로 인해서 그와 똑같이 유명하게 됐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분열의 시대 속에서 그는 일치와 이해를 옹호했고 영원한 평안의 길을 제시했다.”
지은이 ┃ 존 오웬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1616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에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에 입학했으며, 1640년대 말 올리버 크롬웰의 궁정목사가 되었고, 1950년대에는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의 학장을 거쳐 옥스퍼드대학의 부총장을 역임했다. 1657년에는 크롬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시도를 반대했고, 1660년 왕정이 복고된 후에는 비국교도라는 이유로 박해를 당했다.
오웬은 청교도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1642년까지는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는 에드먼드 캘러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런던에 있는 성 마리아 앨버만베리 교회를 찾았다가,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설교가의 설교를 듣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청교도 시대의 영광과 질곡을 모두 경험한 그가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이어가며 최고의 신학자로 남을 수 있던 것은 복음에 뿌리를 단단히 내린 참 신앙 덕분이었다. 그는 참된 믿음만이 온갖 시련 속에서 신자의 영혼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닻이라고 믿었고, 또 자신의 삶을 통해 확인했다.
이 책은 오웬의 영적 통찰력과 진리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주옥같은 책이다. 그의 책은 대부분 신앙 고전의 지위를 누려 왔는데, 국내에 출간된 책으로는 『성도의 견인』, 『그리스도의 죽으심』, 『영의 생각 육의 생각』, 『쉽게 읽는 죄와 유혹』(이상 생명의말씀사) 등이 있다.
지은이 ┃ 조나단 에드워즈
미국이 낳은 위대한 복음주의 신학자. 회중교회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3세도 되기 전에 예일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이미 그때 히브리어와 헬라어, 라틴어를 습득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할 때쯤 회심을 경험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회중교회 사역자가 되었다. 평생에 걸쳐 성경과 청교도 신학자들의 저서를 가까이했으며 칼빈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영광스러워했다. 그의 설교는 조용했지만 그 힘과 영향력은 대단했다. 대각성운동기에는 조지 휫필드와 손을 잡았고, 엄격한 칼빈주의 입장에서 설교했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인 삶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한 긴 논쟁 끝에 20년이 넘게 시무한 노샘프턴 교회를 떠나야 했고, 그 후 프린스턴 신학교 총장에 취임하였으나 두 달만에 열병으로 삶을 마감해야 했다. 저서로는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생명의말씀사 역간), 믿음의 감정에 관한 논문(A 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ctions, 1746), 의지와 자유(Freedom of Will, 1754) 등이 있다.
지은이 ┃ 성 어거스틴
352년 타가스테에서 태어난 어거스틴은 397년 히포의 주교로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교부이다. 그는 젊은 시절, 신앙심 좋은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방황을 했다. 쾌락주의에 빠져 도둑질까지 서슴지 않았던 그는 카르타고에서 공부하면서 왕성한 지적 욕구와 학문적 열의로 불타오른다. 그러나 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무시하며 마니교에 심취한 그는 수많은 영적 지식의 혼란 가운데서 헤매던 중 384년 밀라노로 건너가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고 크게 감화를 받는다. 그리고 2년 뒤인 386년에 드디어 회심하게 된다. 그 후 387년에 세례를 받은 어거스틴은 타가스테로 돌아와 다시 학업에 몰두하고 391년에는 히포를 방문하여 그곳 주교로부터 안수를 받는다. 397년 히포의 주교가 된 그는 그때부터 3년간 『참회록』을 집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이 시대 최고의 성자로 일컬어지는 성 어거스틴은 430년 8월 28일 조용히 자신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